사진에서 작가의 주관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까?

이 날 북토크를 진행하셨던 교수님 한컷
이 날 북토크를 진행하셨던 교수님 한컷

사진에서 작가의 주관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까? 사진이 예술로 인정되지 않던 시절.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이기 때문에 예술로 분류하지 않았던 1930년대 최초로 MoMA 에서 사진으로 개인 전시회를 가졌던 작가 워커에반스의 생각이다. 취미 사진가의 입장에서 그의 사진들은 그닥 매력적이지 않다. 대부분 미국의 건축과 일상을 단조로운 선으로 표현한 사진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으니 어느정도 이해됐다.

다시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정말 사진에서 주관을 배제할 수 있을까? 배제할 수 있다면 작가가 어디까지 개입하는 것이 객관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는걸까? 셔터를 누르는 대상이 사고력이 없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진집 Many and Called에서 작가는 '주관의 배제' 를 위해 카메라를 목에 걸고 유선 원격 셔터를 코트 안으로 해 손에 잡고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최대한 무의식적으로 촬영했다. 하지만 어느 비평가가 '이미 그 사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꾸몄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라고 이야기했고. 본인도 인정한 듯 하다.

이라선 내부1
이라선 내부1

또 작가는 그 당시 사진가들의 신념이었던 프로파간다를 거부했다. 사진으로 사회를 비롯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위선이라 생각했다. 앞에 언급한 철학과 꾸준히 유지하고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런 부분에서 내 생각과 비슷한 점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내 방식이 옳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방식이 아니다. 문제가 발생한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데 나의 상황에서 했던 방식이 과연 옳을까? 과거의 방식이?

작가의 '주관의 배제'에 대한 탐구는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대단한 것은 아무도 사진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에 옮겼다는 점이다. 그런 그의 방식이 주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기회를 잡지 않았을까? 어느 부호의 요트 여행사진을 찍어 줄 기회도 잡고, 당시 소작농의 삶을 담으려 했던 프로젝트에서 다른 작가를 제치기도 했다. 무엇을 할 때 실력 하나만 가지고는 어렵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당일 책방에 있던 워커에반스의 책 모두 너무 재미있게 보았다. 결벽증이라고 까지 이야기하는 건물의 단순한 실루엣을 담으려고 했던 노력은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 살짝 피식 했다. 일부는 그런 일관성이 없었는데 찍다가 지쳤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진을 보는 사람의 해석이 다를 수 있겠지만 워커에반스는 워낙 오랫동안 평가가 된 사람이니..

그가 평생 고민했던 '주관의 배제'는 성공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결과는 오늘날 팝 아트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주관의 배제'는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는 나도 궁금하다. 앞서 언급한 비평가의 이야기 전에 이미 사진가가 셔터를 누르는 시간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부터 주관이 개입된다. 이런 면에서는 차라리 '주관의 배제는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 이후의 작품 세계에 신경을 쓰는 로버트 프랭크 쪽 사진이 더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흔히 로버트 프랭크의 '주관적 다큐멘터리' 와 워커 에반스의 '객관적 다큐멘터리' 로 이야기하곤 한다)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비평을 순수히 받아들였던 사람이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사진을 예술이라 이야기하지 않았던 시대상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모두가 공감하듯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드러내지 않으면 무시하기 십상이지 않은가.

이라선 내부2
이라선 내부2

남의 삶을 토대로 어떻게 살아나갈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시대와 환경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해법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가 어떤 고민을 했었고 어떤 시도를 했었는지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보며 고민해보는 것은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이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단순히 워커에반스는 MoMA 에 개인 전시회를 했지만, 쑥스럽긴 해도 나는 나의 2016년을 돌아보는 개인 사진집을 만들 수 있고 또 너무너무 아주 까마득한 먼 미래의 이야기이겠지만 전시회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뭔가 나만의 방식을 계속 고집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일까. 아니면 타협하고 적절히 융통성있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일까. 고집하다가 정작 찍고 싶은 사진을 하나도 찍지 못하는것은 아닐지 그저 나의 현재와 목표 사이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것인지.. 그것이 궁금하다.


이 글과 관련해서 artsy.net 에서 연락을 해 왔다. 해당 사이트의 로버트 프랭크페이지 링크를 넣어 주길 바랬다. 한번 둘러봤는데 깔끔하게 정리된 로버트 프랭크의 일대기를 볼 수도 있고 그의 작품을 구입할수도 있는 서비스다. 개인적으로 예술 작품을 구입하는 것은 매우 좋은 자극이라고 생각한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여유가 있다면 한번 쯤 구입해보는 것은 어떨까? artsy.net 의 로버트 프랭크 페이지

사진에 의도를 담고 싶다

퇴근길에
퇴근길에

출사 후 집에 돌아와 한숨 돌린 후 그날 찍었던 사진을 보다보면 좋은 사진을 선별하게 되고 이 사진들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 보면 촬영 당시의 상황과 관련이 있던 없던 어떠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어 우연히 다른 가족이 사진을 찍는 상황을 촬영했다고 하자. 이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 이야기로 사진을 정리하는 형태는 의도를 담은 사진이라고 보기 어렵다. 의도를 담았다는 것은 최소한 촬영 전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 것을 촬영하는 것이다.

사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찍기 시작한 것이 이제 1년 정도 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중에 앞서 언급했던 의도를 담았던 사진은  3컷도 안된다. 좀 더 분발해야 하는 것인지 즐겨야 하는 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겠다.

필터와 히스토그램

이태원 거리에서
이태원 거리에서

아름다움을 어필할 수 있는 방법중의 하나는 다채롭고 풍부한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다. 음악에서는 낮은 저역대부터 고역대까지 능숙히 낼 수 있는 능력이고, 연극에서는 슬픔과 기쁨을 두루두루 전달할 수 있는 연기력이 되겠다.

사진에서 히스토그램을 관리하는 것도 비슷하다. 검은색과 하얀색까지 넓고 풍부하게 표현된 사진은 시각적으로 만족스러운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히스토그램은 얼마만큼 다양한 색상이 사용되었는지 알려주는 그래프이다. 좌에서 우로 검은색부터 하얀색을 나타내고 그래프의 높이는 그 지점의 색이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지를 나타낸다. 그래서 히스토그램만 보고도 대충 어떤 사진인지 짐작할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측으로 심하게 몰려있는 형태일 경우 낮에 찍은 하늘일 수 있고, 좌측으로 몰려있는 경우는 실내 또는 밤에 찍은 사진일 수 있다.

낮에 밝은 실내에서 찍은 내 사진 - 설명과 다르다 - 추측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길 :)
낮에 밝은 실내에서 찍은 내 사진 - 설명과 다르다 - 추측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길 :)

여기까지 이해했다면 필터가 어떤 원리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히스토그램에서 일부 색 영역을 제거하거나 변화시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 를 보면 어두운 부분에 살짝 녹색이 도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어두운 부분에 RGB 중 Green 값을 높이는 형태로 비슷하게 흉내낼 수 있다.

결국 필터는 카메라 바디가 현실에 가깝게 표현하려 노력한 사진을 왜곡하여 새로운 느낌을 주는 일련의 과정이다. 단순히 말해서 일부 명암 영역이 변조된 '모자란 사진' 이 되는 것이다.

신기한 점은 이런 '모자란 사진' 이 더 좋아보이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좋은 필터는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치겠지만 간단히 필름과 같은 효과를 내는 방법으로 암부를 클리핑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는 히스토그램에서 좌측 영역을 오른쪽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두운 부분만 밝게 되어 조금 빛 바랜 사진의 느낌이 난다. 사진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며 신비로운 느낌을 갖는다. 필터를 적용한 사진이 좋아보이는 이유는 비현실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국내 사진보다 국외 사진이 조금 더 매혹적이고 좋아 보이는 이유와 같은 이치다. 한번도 목격하지 못한 새롭고 재미있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노이즈는 결과물을 더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면 이런 작업의 방식이나 피사체의 선택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사진을 남기는 이유 중 한 가지는 나중에 다른 곳에서도 사용하기 위해서다. 과한 필터를 적용한 사진은 사용할 당시에는 좋을 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쓸 수 없는 사진이 되어 버린다.

충분히 좋은 사진이건 그렇지 않건 필터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고 좋은점과 아쉬운 점을 정리한다면 필터 없이도 감명을 줄 수 있는 사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아직 모자라지만 언젠가는 새롭고 독특하지 않은 사진으로도 타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진을 찍고 싶다

사진을 찍는 사람의 비전?

이태원 모스크 근처
이태원 모스크 근처

최근 사진에 대한 관심이 커져 관련 서적을 여러 권 구입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추천했던 데이비드 두쉬민의 '프레임 안에서'를 읽고 있는데.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 보다, 관련지식을 알고 임하는 촬영은 더 재미있고 깊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고 있다.

예술을 분석하는 문서들은 대부분 어떠한 한계(한계라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다)로 인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독자 나름대로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내용이 많다. 그래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3번째 읽는 중이다. 특히 사진을 찍는 사람의 비전 이 소개되어 있는데 설명이 조금 모호하다. 그나마 구체적으로 적힌 구절은 다음과 같다.

“수십억 명 중의 한 사람인 우리 자신이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옳다거나 그르다고, 또는 조화롭다고 느끼는 것들에 관한 문제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 '비전'이란 것은 '취향' 과 일맥상통하는 듯 하다. 위의 인용문은 결국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 과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 '비전'을 타인에게 원할히 전달하는 과정은 내 사진을 타인에게 보인다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타인이 좋다고 느끼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은 나의 '취향'이 보편화 또는 대중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나만의 비전을 찾았을 때 그 비전이 대중적이지 않아도 꿋꿋이 그 비전을 고수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취미로 사진 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내가 올린 사진에 아무도 관심이 없다면 슬플 것이다. 이전에는 사진을 찍는 이유로 타인의 관심에는 무심하려 했지만 가끔은 욕심도 생기더라...

음레코드
음레코드

이 '취향'을 대중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건 바로 사진을 보는 사람을 잘 관찰하는 것이다. 사진 목록을 보여주고 좌, 우 키로 쉽게 넘길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준다. 한장한장 넘기다 2초 이상 머무르는 사진을 잘 관찰한다. 가능하다면 어떤 점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물어보고 이야기를 듣는다. 많은 사람에게 의견을 듣기는 어렵겠지만 :)

그리고 나의 경우 주의는 필요 하겠지만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원하는 언행을 일삼..아니 하는 편이 조금 더 이 '취향'을 세련되게 하는 방법인듯 하다.

결국 순수히 나를 위해 사진을 찍지 않는 한 이런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고민을 하는 이유는 조금 더 재미있는 사진 생활을 하기 위함이다.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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